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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읽는 영화 "우아한 거짓말 2부"

빈카소 2020. 12. 30. 12:09

-글로 읽는 영화는 본 영화에 절대적인 빈카소의 시점에서 쓴 리뷰이며, 다소 영화와 맞지 않은 표현들도 들어가 있으니 이점 유의 바랍니다.

 

 

 

 

 

 

 

 

 

 

우아한 거짓말

시작합니다.

 

 

2부.

 

 

 

 

 

"공기청정기는 있는데, 마음청정기는 왜 없는 걸까?"

 

 

 

 정신을 차리고 다시 분주히 일을 시작하는 현숙,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눈을 굴려 확인을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다른 시식코너에서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인간 곽만호를 발견한다. 그는 거의 식사하는 수준으로 시시덕거리며 다른 직원들이 만든 시식음식들을 먹고 있다. 그러다 현숙과 눈이 마주치는데 윙크를 날린다. "어휴 저 그지 x끼 내가 저 x끼 밥 사준 돈만 모았으면... 내가 미친 x이지." 욕이 자동으로 나오는 현숙과 곽만호는 이미 오래전 끝난 사이다. 한때 딸만 있는 집에 아빠라도 만들어줘야겠거니 해서 넉살 좋아 보이는 곽만호와 조용히 연애를 하려 했지만 혼자라는 곽만호의 거짓말은 오래가지 않아 들켜버렸다. 그는 아내가 있었고, 현숙과 같이 딸만 둘이 있는 집이었다. 그때부터 현숙은 곽만호를 끊어내려 하지만 곽만호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나 보다. 어느샌가 현숙의 앞으로 찾아온 곽만호 그런 곽만호를 노려본다. "현숙아 얘기 좀 하자. 좋은 말할 때 나와라, 안 그럼 나 매일 온다. 잠깐이면 돼"

 마트 뒤 어느 한적한 곳, 만호의 거짓말을 알기 전 종종 만나던 장소였다. 잘못했다고 무릎까지 꿇으며 싹싹 비는 만호는 다시 돌아와 달라며 현숙의 바지 가랑을 잡는다. "너 잘못한 거 없어, 그냥 네가 싫어. 됐어?"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은 인간이기에 급히 자리로 돌아가려는 현숙. 그런 현숙을 만호는 무작정 끌어 안아본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실랑이가 계속되던 때 현숙은 결국 만호의 뺨을 때렸다. 한동안 정적이 흐르는 두 사람. 곽만호의 눈이 점점 변해간다. "이게 미쳤나, 진짜!" 순식간의 일이었다. 만호는 현숙에게 손을 올리고 내려치려고 할 때, 옆집 청년 추상박이 나타나 그를 저지한다. "그만 하시죠."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칼로 꽤나 멋지게 등장한 추상박의 눈엔 가히 가녀린 여주인공을 구하러 온 영웅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멋진 등장이 무색하게 그의 싸움 능력은 썩 좋지 못하나 보다. 만호에게 신나게 얻어터지기 시작하는 추상박은 반격은커녕 두 손으로 어떻게 해야 덜 맞을지 아는 듯 머리를 감싸 쥔다. 소란의 소리를 듣고 찾아온 마트 보안들과 옆자리 민머리 총각에 결국 상황은 무마되고, 만호는 그들의 등장에 현숙에게 전화받으라는 말을 남긴 채 황급히 자리를 뜬다. "마음껏 때리셔요 하고 있더만! 괜찮아?" 놀란마음을 진정시키며 추상박을 일으켜 세우는 현숙은 토끼눈을 하고서는 말까지 더듬거린다. "고등학교 때 하도 얻어맞고 다녀서 복싱을 배웠었거든요. 머리랑 배만 잘 가리면 돼요" 세상 태평하게 주먹을 휘두르는 흉내까지 내보이는 추상박에 현숙은 어이가 없다.

 

 학교 등굣길. 학교가 가기 싫은 화연은 엄마의 등살에 억지로 등교를 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갈까 말까를 수십 번 생각하지만 결국 교문 앞까지 왔으니 그냥 등교하기로 한다. 주위에서는 화연의 소문에 수군거린다. "쟤 때문에 3반에 걔 죽었대" 교실의 문턱까지 찾아온 화연의 발은 이 모든 게 다 꿈이었으면 한다. 예전에 단짝 친구들이라며 화연과 함께 다니던 친구들의 무리도 이제는 화연을 없는 사람 취급한다. 아무도 화연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화연은 지고 싶지 않은지 애써 괜히 밝은 척 교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네가 천지 아빠 죽었다고 그랬지." 화연의 옆자리에 앉은 미란의 동생 미라가 강한 어투로 화연에게 말을 건다. "내가 언제? 내가 그랬었나?" 화연은 기억이 안난다는 표정으로 최대한 말을 아낀다. "니 생일날. 우리 언니가 천지 언니 친군데, 우리 언니가 천지랑 어땠는지 하두 꼬치꼬치 캐 물어서. 사고로 돌아가신 분이 왜 자살이냐고 팔짝 뛰더라?" "맞잖아, 화연이 네가 그랬어" "그래서 천지 음침하다고" 그날 화연의 생일파티에 함께 참석한 아이들이 화연을 노려보며 한 마디씩 한다. 과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화연은 아이들의 눈초리를 피할 생각은 없다. "맞으면 만지 언니한테 말해. 그 언니 맨날 보는데 뭘, 하두보니까 정들더라" 화연의 반격에 아이들은 다시 조용해진다. 화연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 정리를 한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미라는 화연에게 분이 덜 풀렸는지 다시 입을 연다. "초등학생 때부터 너 전학 온 애 킬러라는 소문이 있었어. 애들이 너 조심하라고, 안 그럼 천지꼴난다고."

화연과 미라는 언제라도 터질지 모를 미묘한 기싸움으로 서로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나야 불쌍해서 놀아주기라도 했지. 너는 상종이라도 했니?" 누군가에게 한 번도 진적이 없는 화연은 목소리를 내리깔고 강한 눈으로 미라를 상대한다. 하지만 미라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들고 있던 책들을 화연의 머리로 내려친다. 깜짝 놀란 반 아이들은 헉 소리를 내뱉으며 둘을 지켜본다. "천지가 이렇게 되받아칠 줄 모르니까 네 밥인 줄 알았지? 나 같아도 자살했겠다." 화연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는 미라, 그런 미라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화연. 살면서 처음으로 당해보는 굴욕감이었다. 모든 반 아이들은 미라의 편이라도 되는 듯 화연을 쳐다보고 있고,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버린 화연은 상당히 당황스럽다. "천지 살아있을 땐 한마디도 안 하고 다들 가만히 있더니, 이제 와서 나만 나쁜 x이다! 만지 언니한테 고스란히 말해줘야겠네. 천지 반에서 왕따였다고, 내 생일 때 카톡 한 증거 있으니까! 니들 다, 공범이야." 미란과 반 친구들을 번갈아 쳐다보는 화연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 일어나 너희들도 다 똑같다며 주먹을 꽉 쥔다. 그때 흘러나오는 코피. 화연은 교실을 벗어난다. 

 

 화연은 천지를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생일파티에 초대했다. 하지만 천지의 생일 초대장엔 늘 3시로 적혀있었다. 천지가 화연의 생일에 등장할 때는 항상 케이크의 촛불은 꺼져있고 음식들은 다 먹어가는 상태. 다른 아이들의 초대장에는 2시로, 천지의 초대장엔 3시로 여태껏 그렇게 행해왔었다. 천지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화연의 생일파티에 간 날도 그랬었다. 

 화연의 짜장면집 보신각, 가게 쉬는 날에 맞춰 늘 생일파티를 앞당겨 해왔던 화연은 친구들과 함께 케이크를 나눠먹고 이런저런 중화음식들을 먹으며 행복한 생일을 보내고 있었다. 초대된 친구들 중엔 미라도 있었다. "천지, 알고 보면 불쌍한 애야. 걔 어렸을 때 아빠가 죽었거든, 자살로." 화연이 꺼낸 이야기는 거짓말이었고 또, 꺼내서는 안 될 이야기였다. 여기저기서 천지가 음침하다는 둥 비슷한 얘기를 들은 거 같다는 둥, 이목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천지의 이야기로 집중되었다. "천지 이름으로 얘기하지 말고 울 언니로 하자. 괜히 천지 아빠한테 벌 받을라, 그래도 우리 울 언니한테 잘하기" 화연은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자기가 더 빛나 보일수 있을지. 그게 천지의 자존감을 갉아먹고 커가더라도 괜찮았다. 예쁘고 착한 아이의 이미지는 반 친구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늘 자신을 이끌어 와 줬으니까. 이리저리 울 언니 울 언니라며 천지를 위하는 척 불쌍해한다는 명목으로 친구들이 천지를 갉아먹고 있을 때, 드르륵 하고 천지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왔어? 저기 앉아" 반갑게 웃어 보이는 화연에 비해 천지는 오기 싫은 곳을 꾸역꾸역 온듯한 표정으로 쭈뼛거리며 자리를 찾아간다.

"세시라고 하지 않았어?" 천지는 늘상 있는 일이지만 왜 늦었냐는 화연의 말에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대답한다. "아. 2자로 쓴다는 걸 3자로 썼나? 미안. 엄마! 얘 짜장면 한 그릇만!" 여전히 예쁜 미소를 띄며 천지에게 사과하고는 정연에게 짜장면을 시키는 화연. 이미 아이들의 그릇엔 음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천지가 등장할 때부터 아이들과 화연은 핸드폰을 들어 여기저기서 천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선물은? 엠피쓰리!" 화연은 천지의 주변을 살피며 크게 물어본다. "미안, 깜빡했다. 그거 해주려고 했어. 지금은 그냥 당겨서 하는 거잖아. 네 생일 때 정확히 해줄게." 짧게 고맙다고 얘기를 하는 화연. 둘의 대화에 끼어드는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다. 뒤늦게 도착해 짜장면을 꾸역꾸역 먹는 동안에도 그리고 다 먹을 때까지도, 천지의 귀엔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카톡 소리만 들려온다. 천지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내색하면 안 된다. 천지는 괜찮아야만 했다. 자신이 모르면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니까. 

 

 

 어느 반지하방에서는 라면을 끓이는 냄새가 풍겨져 온다. 가구들은 모든 것이 오래되었고 벽지에는 곰팡이가 올라와있다. 한참 밥으로 라면을 끓이던 미란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미라. "만지 언닌 어때? 화연이 얘기. 걔가 천지를 얼마나 괴롭혔는데." 혹시 만지에게 미라 자신에 대해 들은 게 없나 미란의 표정을 살핀다. "너도 천지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은데?"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미란. "솔직히 뻔히 당하는 거 알면서도 모르는 척 순진한 척, 더 싫어" 미라는 어쩌다 이런 말이 나오는지 자신도 잘 모르는 듯해 보였다. 하지만 미란의 말이 사실이었다. 미라는 천지를 좋아하지 않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좋아했지만 좋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너 함부로 말하지 마! 너 솔직히 천지랑 친구 하기도 싫고 안 하기도 좀 그랬는데 천지가 죽었어. 괜히 찔리니까 화연이 걸고넘어지는 거 아냐? 너 혹시 천지 괴롭혔니?" 천지가 떠나 세상에서 제일 친한 단짝 만지가 힘들어하는 것도 슬픈데 동생 미라는 미운 말을 하는 게 괜스레 속상했다. 그리고 혹시나 동생이 천지를 괴롭힌 아이들 중 하나일까 봐 겁이 난다. "그나마 잘해준 건 나야!" 미란의 말에 뭔가 찔리는 듯 소리치는 미라. "어쨌든 힘든 거 알면서도 안도와 준거잖아. 너네 반에서, 거긴 너도 있었고." 미라의 말에 한번 더 타일러보는 미란. 미라는 주눅이 들었다. 

미란이네 가족도 딱히 좋아 보이는 상황은 아니었다. 엄마는 일찍 죽고, 엄마 죽기 전부터 아빠란 사람은 다른 여자랑 바람이 나 지금까지도 만나고 있고. 형편까지 좋지 못하니, 두 자매는 서로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엄마가 세상을 떠난 날부터 줄곧 서로를 챙기고 보듬으며 그렇게 온기를 나누며 살고 있다.

 괜히 꾸짖었나 싶은 미란은 화내서 미안하다며 미라의 볼을 어루만지며 사과하고, 미라는 아니라며 언니에게 미안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다 뜬금없는 말을 하는 미라. "언니. 나 아빠 만나는 여자, 알아" 

 한편 마트에서 오늘도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현숙의 옆엔 손부채질을 하며 화를 내고 있었다. "삼촌이 학교를 한번 가?!" 민머리 총각 앞에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서있다. 입술 주변에는 어디서 맞고 왔는지 피딱지가 앉아있다. "괜찮아 삼촌" 선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척 삼촌이 건네주는 시식음식을 받아먹고 있다. "잘생겼네" 한참 둘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현숙은 밝은 목소리로 아이에게 웃어 보인다. "학교폭력 해결한답시고 cctv 더 달으란다. 아무튼 윗사람들 생각이..." 현숙은 민머리 총각을 안쓰럽게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에게 오만원권 지폐를 꺼내 준다. "괜찮아 받아도 돼. 대신 부탁하나 할까? 네 엄마한테 꼭 말해. 꼭이야. 안 그럼 아줌마가 가서 말해줄 거야." 현숙은 그렇게 아이에게 지폐를 쥐어주고는 두부 굽는 일에 집중한다. 현숙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간다.

 

 다음날 만지와 미란은 미란의 집으로 향한다. 오늘 학교가 끝날 무렵 체육시간 때 미란은 집에 같이 가서 떡볶이를 먹자며 만지를 초대했다. 각자 살림하기도 바쁜데 마음만 받겠다고 웃어 보이지만 미란은 머뭇머뭇 어렵게 "네 엄마랑 우리 아빠 얘기야" 라며 멋쩍게 웃어 보인다. 뭔가 심각한 일인가 싶었지만 만지는 들어보기로 한다. 그렇게 미란의 집에 초대된 만지.  "자 - 다 됐다 미라야 얼렁와" 완성된 떡볶이를 들고 오며 동생 미라와 만지를 부른다. 작은 식탁엔 깍두기와 3인분의 떡볶이가 놓인다. 만지는 떡볶이에 오뎅은 왜 없냐며 귀여운 투정을 부리며 떡볶이를 한입 먹어본다. "맛있네. 태어나서 손님 대접은 처음이다. 기분 완전 좋아. 그러니까 이제 할 말해" 서론은 됐고 본론을 말하라는 듯이 미란이의 눈을 쳐다보는 만지. 미란은 올 것이 왔구나라며 입안에서 씹히던 떡볶이를 삼켜버린다. 한참을 뜸들이다 입을 여는 미라. "네 엄마... 만나는 사람 없어?" 만지의 눈은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떡볶이만 젓가락으로 휘적거리는 미란. "있었어. 알고 보니 양아치였대. 뭐 그렇게 끝난 거 같고." 만지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한다. 그런 만지의 분위기에 미란은 그 양아치가 자기 아빠라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하는데, 놀라는 기색이 없는 만지의 반응에 안 놀랬냐고 되묻는 미란. "분위기 다 풍겨놓고선 어떻게 놀라라는 거냐. 우리 엄마 네 엄마일 몰랐대. 네 아빠가 예전에 죽었다고 그랬대, 그러니까 우리 엄마 미워하지 마" 만지 또한 고백 아닌 고백을 해 보인다. 미란은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는데 그런 미란과 만지의 대화를 옆에서 듣던 미라는 만지의 당당함과 시크함이 신기할 뿐이었다. 미라가 보기엔 천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였다. 그런 미라의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만지는 뭘 그렇게 보냐고 물어보았다.  "천지랑 많이 달라요 언니, 좀 많이." 만지는 궁금해졌다, 과연 자신은 천지에게 어떤 언니였는지. 혹시 천지에게 자신의 이야기는 들은 게 없냐고 물어본다. "천지한테 언니 있는 줄도 몰랐어요, 언니가 우리 언니 친구인지도 몰랐고요." 미라의 답변에 헛웃음을 내보이며 씁쓸하게 떡볶이로 시선을 돌리는 만지. 차라리 자신의 욕이라도 미라에게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천지가 네 아빠랑 우리 엄마, 두 사람 일은 알았니?" 만지의 질문에 켁 하고 목에 걸렸는지 목으로 넘어가던 떡볶이를 토해낸다. 언니인 미란은 깜짝 놀라 괜찮냐며 미라의 등을 두들겨준다. "천지, 우리 아빠 몰라요. 그런 아빠 둔 거 쪽팔려서 말 안 했어요" 겨우 안정을 찾은 미라는 침울한 표정으로 만지에게 대답을 해준다. 미란은 계속해서 미라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한다. 둘은 여태껏 그래 왔듯 웃으며 아까운 거 버렸다며 서로를 챙긴다. 그런 둘을 한참 바라보는 만지는 울컥해진다. 두 자매에서 느껴지는 끈끈함과 따뜻함에 만지는 천지가 자꾸 떠오른다. 나도 좀 저렇게 챙겨줄걸. 결국 시선은 땅으로 향하고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여는 만지. "먹다 말고 미안한데... 떡볶이, 오뎅 없어도 맛 좋거든?... 미안, 근데 나 가봐야 될 거 같아. 나오지 마" 황급히 집으로 향하는 만지의 눈엔 눈물이 자꾸 흐른다. 

 그날 밤도 잠을 못 이루는 만지는 계속 뒤척인다.

 이사 오기 전 집에서 만지와 천지는 같은 방을 썼었다. 어느 날 늦은 밤, 잠자리에 누운 만지는 잠을 자려 눈을 감고 있었고 천지는 옆에 누워 만지의 등을 보며 말을 걸었다. "우리 반에 박미소라고 있는데 따 당하거든? 이유를 모르겠어." 목소리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다 당할만하니까 당하지" 만지는 졸린 목소리로 귀찮다는 듯이 대충 대답을 한다. "언니는 친한 척하면서 뒤에서 욕하는 친구 없어?" "그런 애하고는 친구를 하지 마." "만약에 친구 할만한 애가 그런 애 밖에 없으면?" 피곤한데 계속 쓸 데 없다고 생각하는 질문을 하는 천지의 질문에 만지는 짜증이 났다. "그럼 그냥 혼자 다녀"

 "... 그럼 나는 누구랑 놀아?"

만지는 지난날을 회상하다 떠오른 그때의 기억에 가슴이 미어진다. 그렇다, 천지는 만지에게 말했었다. 천지는 자신에게 분명히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힘들다고, 그런데 자신이 무심결에 무시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칠지경이었다. "엄마... 나 너무 나쁜 언니였던 것 같아"  자고 있을 현숙에게 말을 거는 만지는 계속 코가 시큰거린다. "나도 나쁜 엄마." 현숙 또한 잠을 못 자고 있다. 두 모녀는 그날도 그렇게 천지와의 기억을 회상하며 잠을 쉽게 청하지 못했다.

 

 

 

화창한 오후, 오픈 준비를 하고 있는 짜장면집 '보신각'은 최근 들어 손님이 뜸해져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정영은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배달 간 그릇들이 동네 반경으로 자꾸 없어지는 일이 생기고 또, 최근엔 누가 흉흉한 소문을 자꾸 퍼뜨려 기한 지난 재료들을 쓴다느니 맛이 변했다느니, 알 수 없는 이물질이 나온다는 소문이 동네에 파다하게 퍼지고 있는 것이다. 정영은 생각한다. 이 소문들과 그릇이 사라지는 소행이 누군지 알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당분간은 조용히 지켜보기로 한다. 

 "너 아직도 학교 안 갔어?" 주방에서 준비하고 있던 정영이 홀을 정리하러 나왔는데 화연이 아직까지도 학교에 가지 않고 있던 것이다. "나 오늘 학교 안 가면 안 돼? 배가 아파" 요즘따라 화연이 왜 이리 삐딱선을 타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정영. 어제도 화연이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는 단임 선생님의 전화에 급히 딸이 아프다고 입을 맞춰줬었다. 물론 정형은 몰랐던 일. "친구 생일인 거 깜빡했어. 이만원만 줘" 빨리 학교 안가냐는 정영의 호통에 화연은 친구 생일이라며 이만원을 달라고 한다. "암요, 드려야지요. 나도 내가 내 딸이었으면 좋겠네." 카운터에서 이만원을 꺼내 화연에게 건네는 정영. 화연은 신경질적으로 받아 들어 주머니에 넣는다. 이왕 딸이 늦은 거, 정영은 화연과 대화를 하려 한다. "천지, 죽었다면서." 갑작스러운 천지에 관한 질문에 화연은 순간 움찔해졌다. "너희들 중학교 올라가기 전에 학원에서 전화 온 적 있었어. 너 못 받아주겠대. 애들을 너무 괴롭힌다고. 어휴 ,원비 꼬박꼬박 내는 가시나를 못 받아준다는 거면 그게 보통일이여?" 한 번은 혼낼 필요가 있다고 정영은 생각한다. 그런 정영의 호통에 화연은 왜 자기편은 들어주지 않느냐면서 엄마 딸은 자기가 아니냐는 말을 던진다. "나는 팥쥐 엄마여도 콩쥐 편이여. 남의 가슴에 구멍 내고 다니는 딸년을 어떻게 편을 들어!" 이참에 버릇을 고쳐주려는 정영과는 달리 화연은 상처 받은 마음에 보신각을 뛰쳐나간다. 엄마만큼은 무조건 내편이 되어줬으면 하는데 항상 남의 편에 서서 호통을 치는 정영에 화연은 늘 외로웠었다. 결국 화연은 학교가기를 포기하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내로 향한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가 되기까지 시내 한복판을 돌아다니는 화연의 교복은 거리에서도 어울리지 못하고 억지스러운 색을 띠고 있다. 학교가 마칠 시간이 될 쯤에는 반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내본다. [얘들아 5시 반 노래방 쏜다] 아무리 기다려도 친구들의 답장은 오지 않는다. 머리핀 몇 개를 사서는 사진을 찍어 톡방에 올려본다. [선착순 3명 ㅎㅎ] 하지만 여전히 답장은 없고, 시간이 되어 노래방에서 혼자 친구들을 기다려봐도 올 사람은 없어 보인다. 그렇게 혼자 노래방에서 노래도 부르지 않고 시간을 때우던 화연은 해가 떨어진 시간이 돼서야 슬슬 초원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온다. 외로움과 우울감에 극을 치닫던 화연은 아무랑이라도 얘기를 하고 싶어 경비실로 향해본다. 하지만 경비실에 계셔야 할 경비아저씨는 안 계시고 추상박이 경비실에 자리하고 있다. 옛날부터 지나가며 한 번씩 인사하던 사이인 추상박과 화연은 이웃사촌이다. "아 잠깐 봐달라고 하셔서, 안녕?" 뭐 하고 있냐는 화연의 질문에 추상박은 읽던 책에서 화연의 얼굴로 시선을 돌린다. "저랑 좀 놀면 안돼요? 그냥 얘기라도." 화연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는 추상박, 예전에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쓸쓸한 눈을 가진 소녀 천지와 똑같은 눈을 하고 있어 신기해한다. 추상박이 환영하는듯한 미소를 보이자 화연은 급히 경비실 안에 들어와 추상박과 마주 보고 앉는다. 태평한 미소로 요즘 천지랑 같이 안 다니냐는 질문을 던지는 추상박. 같이 다니는 모습을 본지가 꽤 되었다. "천지 죽었어요 자살로" "뭐?!" 그런데 천지가 죽었다고 말하는 화연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경악을 금치 못한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화연의 눈을 바라보는 추상박은 이내 머리를 감싸 쥔다 "근데 아저씨가 천지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천지의 이름을 말한 적도 없는데 천지의 이름을 아는 게 의아할 뿐인 화연. 그런 화연의 질문에도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천지가 죽었구나, 어쩐지 라며 알 수 없는 말만 내뱉을 뿐이다.

"아... 요 근처 아람 도서관에서 종종 만났었어.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애라 얘기도 많이 하고, 밥도 같이 먹고." 화연은 생각한다. 천지는 얘기하는 걸 싫어하던 아이인데 어째서 추상박의 기억에는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애인 것일까. 혹시 천지가 추상박을 좋아했던 것일까? "천지 언니 이름이 만지라고 하더라고, 근데 옆집에 이사 온 애 이름이 이만지라고 하잖아. 분위기는 다른데 엄청 닮았더라고. 근데 천지는 어디 갔나 했지. 아- 왜 그랬을까" 추상박은 그저 어두운 분위기를 가진 질풍노도의 십대 소녀인 줄로만 알았더 천지가 세상을 떠난 게 어쩌면 조금 더 자신이 얘기를 들어줬으면 어땠을까 하며 안타까워한다. 그런 추상박을 뒤로한 채 깜빡한 게 있다며 급하게 자리를 뜨는 화연은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공기청정기는 있는데, 마음 청정기는 왜 없는 걸까?' 천지가 갖고 있던 노트를 살펴보는 만지는, 지금 천지의 발자취를 찾아보고 있었다. 그때 울리는 만지의 휴대폰엔 화연의 번호가 뜨고 있었다. "언니! 저 화연이에요. 옆집에 긴 머리 아저씨 살죠. 조심하세요! 그 아저씨 천지랑 아는 사이예요. 천지가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같이 본 적 있거든요" 쉴 틈 없이 얘기하는 화연은 뜬금없이 옆집 아저씨가 천지랑 아는 사이니 조심하라는 말을 한다. 만지는 특유의 귀찮은 말투로 '그게 왜' 라며 되짚어 질문하는데, "근데, 나 몰래 아람 도서관에서 둘이 자주 만났다네요?" 만지는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그러니까 천지랑 옆집 아저씨랑 좋아하는 사이라도 됐다는 말인가? 만지는 화연에게 웃으며 둘을 엮는 거냐며 물어본다. "그렇게 들리면 그런 거고요. 전 사실만 얘기하는 거고요. 그리고 이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천지가 죽기 전날, 그날도 둘이 만났었데요" 그렇게 실소만 하던 만지는 점점 표정이 굳어간다. 혹시란 말을 써야 한다면 지금 써야 할 말인가 싶다. 천지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던 건 아니었을까 싶은 만지는 급하게 통화를 끊고 직접 추상박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러 옆집으로 향한다.